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번역체 문장 (문단 편집) == 주의 사항 == >글을 쓸 때 흔히 강조하는 '우리말답게 쓴다'는 것은 곧 '말하는 듯이 자연스럽게 쓴다'는 뜻이다. '하나의 사과'를 단순히 일본어투라서 쓰지 말자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사과 하나'라고 말하는 게 우리에게는 더 자연스러운, 즉 '우리말다운' 어법이기 때문에 기왕이면 우리말투를 살리자는 것이다. 다소 어려운 한자어이든 낯선 외래어이든 그것이 우리말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는 기능을 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다만 그것은 우리말다운 고유의 틀을 해치지 않는 한에서 우리 언어 체계에 녹아들어 올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 >- 홍성호, <짧고 쉬운 문장이 최고?> 중 번역체는 특정 형식이나 표현 그 자체로 정의되지는 않고 그 양식이 쓰인 맥락 속에서 결정된다. 이 맥락은 시대가 지나면서 계속 바뀌며, 이에 따라 어떤 표현의 의미가 바뀌는 일이 많고, 반대로 기존에 옳은 표현이 상술됐듯이 번역체 내지는 [[오역]]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한국어에 번역체 문법이 늘어나는 것을 '오염'처럼 생각하는 것은 [[국수주의]] 사상이 되기 십상이다. 번역체 문장의 하위 문서에도 해당 문체의 예시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쓰여 있으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번역체를 [[오역]]으로 인식하고, 서브컬처계에서 번역체 논란이 상당히 자주 나타나다 보니 번역체는 무작정 배척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오덕들도 많은데, 사람들의 편견과 다르게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쓰이는 번역체는 굉장히 많다. 과학 용어 가운데 상당수가 영어와 일본어를 거쳐 들어온 번역체이고, 번역체 밖으로 조금 더 넓게 보면 [[띄어쓰기]]와 온점, 반점, 느낌표와 물음표 등의 문장 부호와 가로쓰기 또한 서양에서 들어온 표현 양식이며 고작 20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외래 용법이다. 곧 이런 표현들이 점차 자연스레 언어에 수용되면 [[거짓짝]]이나 불규칙을 너무 많이 일으키지 않는 한 언어의 표현력이 더욱 풍부해지고 기존 우리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사물과 개념들을 새로운 비유와 관용어들로 나타낼 수 있게 된다. 무턱대고 번역체라고 배척하는 것은 언어문화에 좋지만은 않은 것이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590888|#]] 엄밀히는 우리가 자주 쓰는 표현은 아닌데 위에 적힌 '틀에 박힌 교육 방법'처럼 __해당 표현의 유래와 무관하게__ 외국어를 번역하다 보면 흔히 나타내는 표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 자체로 언어와 언어가 교류하는 일종의 문화 교류 과정 속에서 시대에 따르는 변화로 보는 관점이 조금 더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니 번역체는 오역으로 인해 어색하게 느껴지는 표현과 문법, 용법에 위배되지 않음에도 자주 쓰이지 않아 낯선 표현과 문법 모두가 속한다. 전자는 수정하는 것이 옳지만 후자는 무턱대고 배척하면 안 된다. 문학계에서도 잘 쓰면 말의 맛을 살리므로 무조건 배척하면 안 된다는 견해도 있고([[https://brunch.co.kr/@nukeguys/43|링크]]), 번역체가 주는 독특한 느낌을 활용하는 움직임도 있으며, [[무라카미 하루키]]도 번역체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단순히 어색하다고 배척하면 사어에 가까운 언어들이 주는 독특한 느낌을 이용하고자 문학 작품에 쓰는 행위도 그른 것이라 주장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번역체 문장이 무조건 그른 문장인 게 아닌 것이다.''' 이런 표현 중 '~에 대하여'와 같은 표현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예문 세 가지를 살펴보자. '강력 사건에 대한 대책',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 '건강에 대하여 묻다'와 같은 예문 중, '강력 사건에 대한 대책'은 이미 [[겹말|'대(對)' 자가 들어가 있기에]] '강력 사건 대책'으로 바꾸어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 '건강에 대하여 묻다'와 같은 예문에서 '대하여', '대한'을 선뜻 빼기엔 쉽지 않다. 굳이 뺀다면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은 '전통문화에 관심 주기'로 바꿀 수 있겠으나, 그 표현 앞뒤로 '대하여'가 [[패러프레이징#패러프레이징이 지켜지면 안 되는 예외(?)|수없이 등장해서]] 지루함을 유발하는 게 아닌 한, 저런 표현을 굳이 말살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표현을 제약받아 재미없는 글이 될 것이다. 게다가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은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대하다'의 예문으로 나오는 표현이다. '건강에 대하여 묻다' 등은 '~를 묻다'라는 식으로 교열하거나 수정하기도 하지만, 우리말에서 '안부를 묻다'는 있어도 '건강을 묻다' 식의 표현은 없다. 이는 맥락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를 묻다' 같은 말을 쓰는 경우는 주로 수다와 잡담 같은 [[스몰토크|가벼운 주제]]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 대하여'라는 표현은 그런 단순한 상황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다. '건강에 대하여 묻다'라고 했을 경우, 이는 의사에게 건강을 주제로 폭넓은 질문을 하는 상황이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학술 논문과 같은 전문적인 주제를 다루는 글에서 '대하여'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문화적 맥락에 따른 표현의 쓰임새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이를 고려하지 않은 기계적인 수정은 현실에서 아무도 쓰지 않는 표현을 낳아 [[교각살우|오히려 언어문화를 망치는 꼴]]이다. 정 교정하고 싶으면 '건강이 어떤지를 묻다'처럼 교정하는 게 낫다. 또 다른 대표적 예로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있다. 요즈음에는 '불구하고' 같은 한문투 표현을 잘 안 쓰기 때문에 '불구(不拘)하고'가 없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는 있으며, 최근 들어서는 한문투 표현을 올바르지 못한 말이라면서 배척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이런 표현은 국립국어원에서 편찬한 [[표준국어대사전]] 예문에도 버젓이 실려 있어 그른 표현이라고 단정할 근거가 희박하다.[[https://ko.dict.naver.com/#/entry/koko/0b5a6cf6b68447df81e60cfb6f7054cc|링크]] 좀 더 자세한 [[https://ko.dict.naver.com/#/entry/koko/5dde376eb95d4fd29fc8b2882ad564fc|설명]]을 보면 "「…에,-음에」('-에도/-음에도 불구하고' 구성으로 쓰여; '-음에도' 대신에 '-ㄴ데도'가 쓰이기도 한다)"라고 나와 있다. 이러한 문장이 쓰인 예시를 보면 [[이문열]] 같은 대가의 문장도 있다. 게다가 검색해 봐도, [[카더라|이러한 표현이 정확히 어느 나라에서 왔다는 설명은 없다.]] 다만 글자 수가 제한된 기사문을 쓸 때에는 쓸데없이 글자 수만 늘려 버리기 때문에 '그럼에도'만 쓰는 게 좋다고 권유하는 기사가 있다.[[http://www.nspna.com/news/?mode=view&newsid=62360|링크]] 이 견해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영어에서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중역 과정에서 나타난 표현이었던 것을 영어 번역투로 소개한 것이고(이때 '일본어 번역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앞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처럼 과거에 자주 쓰이던 한국어 관용 표현들이 21세기 현대 한국어 화자의 관점에서 낯설어서 [[수평 폭력|괜히 영어나 일본어에 원인을 덮어씌우는 것]]이다. 사실 글은 무조건 짧다고 잘 읽히는 것이 아니며 운율감도 있어야 하므로, 기능으로는 없어도 상관없는 단어일지라도 의미를 강조하고 운율감을 더하고자 쓰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리고 기사문일지라도 일간지와 월간지는 또 다르다. 월간지에는 지면이 너무 허술해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단어를 추가하기도 한다. 제한된 글자 수 안에 최대한 많은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기자의 관점과 특유의 말맛을 살리면서 문장의 운율을 만들어야 하는 작가의 관점이 다르니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위 문서에 적힌 사례들 중 일부는 [[과도 교정]]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없잖아 있다. 한 예시로 '~에의'와 관련해 예전에는 영어 번역투나 일본어 번역투로 취급하면서 한국어에는 마치 합성 조사가 없었다는 듯이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합성 조사는 [[중세 한국어]] 시절부터 있었고, 현대 한국어에 들어서는 때에 따라 3중 합성 조사(-에서만은, -으로서도는), 드물게는 4중 합성 조사까지(-에까지만은) 나타나며, '~에의' 역시 중세 한국어 시절에 '~엣(에+ㅅ)'과 같이 정확히 똑같은 의미의 합성 조사가 있었다. 이 '합성 조사 일본어 번역투설'이 사실이면 본래 한국어의 조사 자체가 고유한 게 아니고 오래전에 일본어에서 그 문법적 개념을 빌려와 생긴 것일 가능성을 대폭 열어 준다. 심지어 번역투를 문제 삼는 교열자 중에서 어떤 부류는 \''''~에의'''' 합성 조사만 문제 삼는 걸 넘어 조사 \''''의'''' 자체가 우리말에 아예 없었던 일본 수입품이라고 주장하면서 조사 \''''의''''만 보면 삭제하려고 들기도 한다. 하지만 언론사 교열 기자인 엄민용은 자신의 저서 <나도 건방진 우리말 달인: 완결편>에서 \''''의''''자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잘못된 주장을 퍼트리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엄민용은 시중에 나온 여러 교열 서적을 우격다짐식 주장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또한 \''''~적(的)'''' 도 중국어 번역투 취급하며 눈에 띄는 족족 지우려는 사람들이 있다. '공식적인 답변' 등의 '-적'에는 아닐 수도 조금은 있다는 느낌이 있기도 하니 공식인 게 확실하면 '공식 답변'처럼 쓰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저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글을 쓴 것을 읽어 보면 정작 [[순우리말]]의 맛은 느껴지지 않는 글이 허다하며, 그러한 주장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쓴 일반인들의 글과 비교해 보아도 뚜렷한 차이가 없다 하는 것이다. 흔히 순우리말 어휘를 잘 살린 글로 [[이오덕(아동문학가)|이오덕]]의 글을 꼽으나 번역투 말살에 집착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오덕의 글맛을 전혀 못 살린다. 애초에 [[순우리말]], [[한자어]]를 많이 알고 적절히 활용해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데, [[조사]]나 [[접사]] 같은 지엽적 부분에만 집착하니 저런 헛수고를 하는 것이다. 이는 언어에 대하는 국수주의적 태도가 우리말 보존에도 별 도움이 안 됨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사실 저럴 수밖에 없는 게, 이오덕은 농촌에서 살았던 사람인 반면에 번역투 문제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스타벅스가 익숙한 도시인이라 이미 감성이 도시화, 서구화해 있기 때문이다. 농촌 정보를 공부하면 모를까. [[한국어/문법#s-7.1|사실 현대 한국어의 문법 체계부터가 서구식 문법 체계를 차용한 것이라 번역체와 고유한 한국어의 경계도 희미하다.]]] 번역투 사례들을 유심히 본 사람들은 어렴풋이 눈치챘을 수도 있는데, 이처럼 근본적 번역투로 볼 이유가 합리하지 않은 것들의 상당수는 [[번역체 문장/영어|영어 번역투]]와 [[번역체 문장/일본어|일본어 번역투]]에 똑같이 소개된 적이 있다. [[이중 피동 표현]]처럼 국립국어원에서조차 딱히 번역투라고 하지 않는 표현에까지 '번역투' 딱지를 붙이면서 이게 영어 번역투인지 일본어 번역투인지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정작 번역투라고 설파하고 다니는 강사들조차 그 표현이 정확히 어째서 번역투인지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을 무조건 맹신하지 말고, '''글의 목적에 따라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게 현명하다.''' 이 문서와 하위 문서에서 본래 다룰 번역체 문장은 외국어의 번역체라는 이유만으로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 사용되는''' 한국어와 억지로 호환하면 문장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도록 방해하거나 의미 자체를 왜곡하기 때문에 문서 따로 분류한 것이다. 위에 언어의 표현력이 더욱 풍부해진다고, 위 문단에 특히 [[한국어]]는 같은 문장도 어미에 따라 문장의 느낌이 확 달라진다고 서술했지만, '~에 대하여(서)' 등 번역체 부분의 어순이 딱 정해져 있고 종결형으로 '○한다'도 '○하였다'도 '○하기'도 아닌 연결형 '○하여(서)'가 쓰이거나 [[시제|비과거 관형사형 '○하는'/'○할'의 자리에 과거 관형사형 '○한'이 쓰이듯이]] 정작 번역체에는 [[불완전 동사|풍부하게 활용되지 않아]] 사실상 [[한국어/불규칙 활용|불규칙으로 활용되는 말들]]이 많다([[http://www.korjnu.kr/bbs/board.php?bo_table=0301&wr_id=417&page=3|#]]). 번역체를 수용하긴 하는데 그 어떤 표현 자체를 문법화해서는 특정 활용 밖의 나머지 활용들은 모조리 배척하고 번역체 등이 자연스레 언어에 수용되는 것은 거부하는 암묵적 [[규범주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문(문법)|비문]]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언어의 사회성|대개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뿐]]더러 '올바른 비문'과 '잘못된 정문'도 있다. 이때는 동의어나 유의어로 바꿔 보면 느낄 수 있다. 상술되기도 한 '대하다^^2「2」^^', '불구하다^^2^^' 관련 진짜 문제는 \''''그에 대하기'''', \''''이럼에 불구하며'''' 같은 다채로운 활용을 할 수 있는데도 사전에 "【…에】 ((‘대한’, ‘대하여’ 꼴로 쓰여)) 대상이나 상대로 삼다.", "「…에,-음에」('-에도/-음에도 불구하고' 구성으로 쓰여;'-음에도' 대신에 '-ㄴ데도'가 쓰이기도 한다)"라는 설명이 있을 정도로 굳어져 '~에 대하여(서)', '~에 대한', '~에도 불구하고' 꼴로만 쓰는 것과 '[[비문(문법)]]' 문서의 '올바른 비문' 문단 내용처럼 호응하지 않는 문장도 있는 것. [[언행불일치|무턱대고 배척하지 말자는 사람들도 이런 다채로운 표현들은 배척한다.]] [[규범주의와 기술주의]]로 따질 때, 문법 문제/활용 문제 상관없이 자주 쓰이는 표현에는 기술주의를, 그다지 안 쓰이는 표현에는 규범주의를 [[이중잣대|적용하는 셈이다.]] '~에 대하여(서)', '~에도 불구하고' 자체를 문법화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와 달리 '대하다^^2「1」^^'는 '~를/을 대하는'처럼도 쓰이는 완전 동사이지만 '~에 대하여(서)', '~에 대한'이 특히나 굳어져서인지 '~를 대하여(서)', '~를/을 대한'으로는 그다지 안 써진다. 어떤 대상으로 삼곤 한다는 현재형 의미로 쓰인 '언어에 대하는 태도' 등을 '언어를 대하는 태도' 등으로 무턱대고 바꾸는 사람도 있고, 이 밖에도 비슷하게 '선생에게만 의해서 배운다', '가족을 위하러', '이에는 경찰이 대해 설명했다' 따위의 활용을 틀린 활용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표현들을 쓰이지 않는다는 등 이유로 세세한 분석 없이 무턱대고 배척하는 것 또한 [[문법 나치]]의 행위 내지 과학적 방법론의 존재 자체를 깡그리 의미없는 것으로 만드는 매우 잘못된 것인 셈이다. [[고증]]과 창작물 반영/설정으로 따질 때 세세한 분석은 역사학자들이 그냥 고증 반영이 틀렸다 하지 않고 역추적해서 연구하는 셈이고, 무턱대고 배척하는 것은 [[창작물의 반영 오류|창작물 반영 만능주의]]처럼 되거나 [[설정 오류]]를 무시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설정만 즐기는 것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또한, 동의어 관계이기도 하면 하나는 널리 쓰이고 다른 하나 또는 나머지는 [[사어]]가 될 가능성이 있어서 표현력이 도로 줄어들 수도 있다(<[[이음동의어]]> 문서 참고). '~에게서'와 '~한테서'는 아직 사어는 아니지만 '~에게'와 '~한테', '~(으)로부터'에서 밀려 사어가 될 수도 있는 사례이다. 따라서 한국어가 잔뜩 수정되지 않는 한은 문장에 맞지 않는 번역체를 오남용해 [[국어파괴|문장의 가독성을 파괴하거나 뜻을 왜곡하는 등]]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번역체라는 이유만으로 지나치게 배척하거나 '오염'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번역체를 새로운 표현으로서 받아들이냐 마느냐는 그 시대 언어 사용자들에게 맡기는 것이지, 배척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번역체를 오남용하는 쪽과 번역체를 지나치게 배척하는 쪽의 갈등은 규범주의 대 규범주의로 볼 수 있으며, 어떻게 보면 무턱대고 배척하는 것은 상술된 '원문 그대로 표현을 전달하려는 심리'와 '전체 문장의 뜻을 고려하여 번역하면 사전적인 뜻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찝찝하다고 느끼는 강박 관념'의 [[안티테제]]로 볼 수도 있다. 특히 이곳 [[나무위키]]에서 번역체 관련으로 일부 편집자들이 과도하게 교정하려고 든 나머지 [[비문(문법)|비문]]을 만들어 내는 일이 종종 있다. 특정 형식 자체를 번역투로 보면 안 된다. 해당 형식이 해당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면 번역투가 아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순화를 권장하기도 하지만 위아래에서 언급한 예문처럼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의 내용에도 해당 번역체가 있으며, 전문가들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사용을 피하라고 권유하지, 무조건 없애라고 하지는 않는다. [[https://ko.dict.naver.com/#/correct/korean/info?seq=1001618|링크]]. 예를 들면 '학생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다'는 "학생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또는 "학생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처럼 '~에게'로 다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 대해서'와 같은 표현들이 맥락상은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도 억지로 없애는 것은 바람직한 언어 문화가 아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번역투는 특정 형식이나 표현 그 자체로 정의되는 건 아니라 맥락 속에서 결정된다. 한국어 자체가 고맥락 언어이기에 맥락에 맞는 표현을 쓰는 일이 더욱 중요한데 이 같은 과잉 수정은 오히려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며, 이것이야말로 [[국어파괴]]이다. 물론, 여기서 잘못된 교정 결과로 예로 든 '~을/를 대하며' 같은 표현 자체가 그른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곤란하다. '~을/를 대하며'는 '나는 그를 대하며(=그와 마주해 있으며) 여러 생각을 했다'와 같은 맥락에서는 당연히 자연스러운 표현이지만 '나는 이 사건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를 '나는 이 사건을 대하며 곰곰이 생각했다' 따위로 바꾸면 대단히 어색한 문장이 튀어나온다.[* 사실, 뜻풀이를 생각하면("대상이나 상대로 삼다.") '~을/를 대하여'로 고치는 게 바르다고 할 수 있지만 이미 널리 퍼져 굳어진 바람에 이런 식으로만 쓰인다. [[새로움에 호소하는 오류와 전통에 호소하는 오류|'새로움에 호소하는 오류'와 '전통에 호소하는 오류']]도 이런 사례. '호소하다'는 앞에 목적격 조사 '~를/을'을 삼는 것이 바르나 예외적으로 '~에'가 쓰였다. 일반적 기준으로 보면 새로움이나 전통에 오류를 호소하는 것이 된다.] 한국어는 과장 좀 보태서 맥락으로 시작해 맥락으로 끝나며, 맥락에 죽고 맥락에 사는, 맥락 그 자체가 문법성의 척도가 되는 언어이기 때문에 늘 문맥을 최우선 고려 요소로 둬야 한다([[비문(문법)#올바른 비문|심지어 문법보다도]]). 안타깝게도 한국어의 맥락 의존성을 비롯해 한국어의 전반적인 특성 자체를 국내 교육계에서 시간이 부족해서인지 제대로 가르치고 있지 않고, 이로 인해 번역투 수정을 비롯한 고쳐쓰기의 준거를 피상적으로 적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번역투인 걸 알면서도 일부러 쓰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앞서 언급된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렇지만 대표적인 번역투 문장으로 지적되는 '[[번역체 문장/영어#s-4.2|가장 ~한 것 중에 하나]]'도, [[가장]]의 개념을 넓게 잡는 영어권 언어의 사고방식이 좋아서 알면서도 그렇게 쓰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요즈음에는 전 세계를 상대로 경쟁하는 시대이므로 최고의 범주에 드는 것이 여럿이래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예를 들면 객관적 비교 수치가 있는 스포츠 스타도 수상 실적이나 기록이 엇비슷하면 한 명만 최고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특히 문화 예술 분야에서 \''''Most of'''' 운운하는 경우는 거론된 모든 작품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기 때문에, 순위가 있더라도 형식에 불과하다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물론 한국에서는 '[[가장]]'을 '[[제일]]'의 동의어로 1등일 때만 쓰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이를 어색하게 받아들이는 언중들이 많지만, 최근에는 가치관이 다양해지면서 최고가 꼭 하나여야 하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이, '[[수우미양가]]'도 단어 자체로만 보면 논리적 문제가 있지만, 관습으로 굳어져서 문제하는 사람이 없다.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대중매체#TV 프로그램, 방송국|최우수상 위에 있는]] [[대상]]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가장 ~한 것 중에 하나''''도 관점별로는 번역투로 보기보다는 관용적 표현의 일종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번역투의 증가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변화와 시대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번역체에 집착해서 하술된 것처럼 '~ 가운데 한 명' 등 동의어/유의어를 의역 내지 오역으로 몰아가는 일이 있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대상도 한 번에 여럿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된다. 아니면 최우수상 위의 대상을 없애거나. 나아가 번역체를 위 내용처럼 다채롭게 활용하려는 것일 수도 있으며, 번역체에서 어휘력을 늘리기도 한다. 위 각주에도 있는 '[[그남]]'은 'he'에 대응하고자 쓰는 것이다. 여성을 지칭하는 'she'의 대응인 '그녀'만 있어서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